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 함화당 · 집경당 (문단 편집) ==== 외국 공사를 접견한 집경당? ==== 《[[고종실록]]》과 《[[승정원일기]]》에는 [[외국]] [[공사]]들을 접견한 곳으로 집경당이 나온다.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/dir/node?dataId=ITKC_ST_Z0_A29_07A_18A_00180&solrQ=query%E2%80%A0%EC%A7%91%EA%B2%BD%EB%8B%B9$solr_sortField%E2%80%A0$solr_sortOrder%E2%80%A0$solr_secId%E2%80%A0ST_AA$solr_toalCount%E2%80%A022$solr_curPos%E2%80%A09$solr_solrId%E2%80%A0GS_ITKC_ST_Z0_A29_07A_18A_00180|#]]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/dir/node?dataId=ITKC_ST_Z0_A29_07A_25A_00570|#]]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/dir/node?dataId=ITKC_ST_Z0_A30_02A_08A_00350&solrQ=query%E2%80%A0%EC%A7%91%EA%B2%BD%EB%8B%B9$solr_sortField%E2%80%A0$solr_sortOrder%E2%80%A0$solr_secId%E2%80%A0ST_AA$solr_toalCount%E2%80%A022$solr_curPos%E2%80%A014$solr_solrId%E2%80%A0BD_ITKC_ST_Z0_A30_02A_08A_00350|#]]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. 집경당의 한자는 ‘緝敬堂’인데 [[외교관]]들을 만났다는 기사에는 표기가 ‘集慶堂’인 것이다. [[경희궁 회상전#s-4.1|‘集慶堂’ 한자를 쓰는 건물]]은 [[경희궁]]에 있었다. 침전 [[경희궁 회상전|회상전]]의 부속건물인데, 정황 상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그곳에서 [[외국]] [[공사]]들을 만났을 리 없다. [[1860년대]]에 지은, [[경복궁]] 중건과정을 다룬 책인 《경복궁 영건일기》에는 [[경희궁]]에서 건물 5채를 제외하고 전부 헐어와 자재로 썼다는 내용이 있다. 그런데 남은 건물들 중 집경당은 언급되지 않았다. 이를 보아 [[1890년대]]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. 또 설령 남아있었다 해도 허허벌판이 되어 이미 다른 용도로 쓰고 있던[* 경희궁 터에 경작지를 만들고, [[뽕나무]] [[숲]]을 일군 뒤, [[창고]]와 양잠소까지 세웠다.] 옛 [[궁]]에 굳이 가서 [[외국]] [[공사]]를 접견할 일이 없다. 그리고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외교관들을 만난 날의 《승정원일기》 기록은, 항상 '상(임금)이 [[경복궁]]에 있었다.'로 시작한다.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dir/node?grpId=&itemId=ST&gubun=book&depth=5&cate1=&cate2=&dataGubun=최종정보&dataId=ITKC_ST_Z0_A29_07A_18A_00020|#]]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dir/node?grpId=&itemId=ST&gubun=book&depth=5&cate1=&cate2=&dataGubun=최종정보&dataId=ITKC_ST_Z0_A29_07A_18A_00020|#]][[http://db.itkc.or.kr/dir/item?itemId=ST#dir/node?grpId=&itemId=ST&gubun=book&depth=5&cate1=&cate2=&dataGubun=최종정보&dataId=ITKC_ST_Z0_A30_02A_08A_00020|#]] 그래서 저기서 말하는 집경당은 [[경희궁 회상전#s-4.1|경희궁 집경당]]이 아닌, 경복궁의 집경당일 가능성이 높다. 그렇다면 ‘集慶堂’이 [[오타|오기]]일까. 그렇게 보기에는 [[공사]]를 만난 [[기록]]들마다 표기가 일관되게 ‘集慶堂’인 점이 걸린다. 그렇다면 외교관들을 접견하기 위한 ‘集慶堂’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. 그도 아니면 용도에 따라 같은 건물의 [[한자]] 표기를 다르게 했던 것일까.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